간만에 좀비 영화 <웜바디스>를 봤다. 감염으로 좀비들이 가득해진 근미래의 세상.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던 좀비 ‘R’(니콜라스 홀트)이 아름다운 소녀 ‘줄리(테레사 팔머)’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 코미디. 그런데 말이다, 러브스토리를 뚜욱 옆으로 떼어놓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왠지 내가 그 영화 속 좀비처럼 느껴졌다.

[박정선의 살다보니 4회] ‘월급 중독’을 넘어서…

충격 고백! “내가 좀비였어요.”

외롭다고, 길을 잃은 거 같고 미래도 없는 거 같다고, 그냥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고… 그래서 그냥 오랫동안 삶의 의미를 잊고 살아온 거 같다고. 그렇게 되뇌이는 좀비 R의 나레이션이 그냥 남의 말 같지가 않았다. 뻐덩뻐덩해진 몸으로 별 생각없이 걸어다니는 영화 속 좀비들의 모습 위로 아침 출근길 잠이 덜 깬 채 수많은 인파에 치이며 꾸역꾸역 사무실로 향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하면 너무 오버인 걸까. 뭐 물론 하루하루 자신만의 꿈을 지니고 보람있게 살아가는 직장인들도 많을 테니 “너 임마, 니 인생이 재미없다고 남들까지 다 좀비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라고 하시면 사실 “죄송합니다,꾸벅” 이러고 돌아설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어느 새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품었던 꿈 같은 건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냥 밥벌이를 위해 일을 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래서 하루하루가 마치 시지프스의 뻘짓처럼 느껴질 때. 자연스레 나는 잘 살고 있는 건지, 과연 내 커리어에 미래는 있는 건지 뭐 그런 고민들이 패키지처럼 따라 붙는다. 계속되는 야근에 지친 몸으로 허덕이다 주말 내내 뻗어서 잠만 자다 일어나 또 엄혹한 월요일 아침을 맞을 즈음이면, 하루 종일 어슬렁거리다가 한번씩 사냥(?)하러 가는 게 하는 일의 전부인 진짜 좀비들의 팔자가 더 나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바이러스는 ‘월급’

아이러니하게도 직장인들을 ‘좀비화’시키는 바이러스는 바로 ‘월급’이다. 한 달에 한 번 통장에 꽂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월급. 근데 그 녀석이 마약처럼 직장인들을 ‘좀비화’한다. 한해 한해 그 액수(투여량)가 늘어나는 건 좋은데 또 그만큼 어영부영 씀씀이도 커지고 어느 새 날아드는 카드값 막기에도 급급해지더란 말이다. 정작 이 일이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백만 번 ‘이놈의 회사 때려치운다.’ , ‘김부장! 내일은 니 낯짝에 사표를 던지고 말리라!’ 이렇게 궁시렁거리면서도 당장 못 그만 두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월급중독

근데 사실 ‘중독’이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굳이 월급중독을 끊을 필요는 없다. 당신이 자신의 일에 만족한다면 말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직장인 대부분이 회사를 다니면서 별 재미를 못 느낀다는 거고, 또 설사 자기가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더라도 가끔씩은 허탈함과 허무함에 빠질 때가 있게 마련이라는 거다. 월급 중독이 위험한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일’이라는 것에 포함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 – ‘꿈’이라거나 ‘자아실현’이라거나 ‘재미’ 같은 – 것들은 죄다 사라지고 ‘밥벌이를 위한 돈벌기’라는 한 가지 의미만 남아 있을 때조차 당신을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족쇄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는 순간 우리는 어느 새 ‘좀비화’되어버린다.

꿈꾸면 되지 않나요?”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 있네.

그렇다면 의외로 방법은 심플하다. (원래 ‘내’ 일이 아니면 다 좀 심플하긴 하다. ^^;;)

1안 회사 때려치우고 내가 원하는 꿈을 찾아 떠난다.

2안 지금 하는 일에 ‘재미’ 혹은 ‘내가 원하는 것’을 더한다. 

사실 1안이 이상적이긴 하다. 그런데 월급중독이라 지금 밥벌이를 때려치우기가 쉽지 않으니 1안은 어차피 지금 당장은 안 된다. 꿈을 찾고 싶긴 한데 그렇다고 스타벅스 마시다가 커피 믹스 먹기는 싫고 뭐 그런 거다. 많은 월급중독자들이 정작 ‘꿈’을 운운하면서도 사실은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꿈으로 도피’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나는 언젠가 OOO를 할(될) 거야.”라고 말은 하지만 그런 꿈은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유예된다. 그들이 말하는 꿈은 지금 자신의 현실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지만,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서 스스로에게 주는 ‘면죄부’ 같은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제가 지금 무척 괜찮은 소설을 구상 중이에요.”라며 10년째 말하면서 정작 단편 하나 못쓰는 소설가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건 2안이다. 사실 요즘같이 취업도 안 되고 불경기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인간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투덜투덜대면서도 몇 년씩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사실 의외로 적성에 맞다는 것일수도 있다. 필요한 건 거기에 양념을 치는 일이다. 자신의 업무를 조금씩 다듬고 조각해서 자신에게 맞추어 보는 것. 첫 번째는 자신의 업무가 식상하고 재미가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면 본 업무 외에 흥미가 가는 업무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업무 영역을 넓혀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광고 기획사의 프로모션 이벤트 기획 담당자가 프로모션 아이디어 외에 꾸준히 카피나 광고 아이디어를 내다가 나중에는 예전부터 자신이 꿈꾸던 카피라이터 자리를 꿰차기도 한다.

두 번째는 자기가 하는 업무에 대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한예종의 경비 아저씨를 떠올려 보자. 경비 일을 ‘문이나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분은 ‘그 문을 들어서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그 분만의 특별함과 경쟁력이 부각되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업무에 대해 새롭게 의미 부여 이미지

꿈틀꿈틀’ 꿈꿉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을 코칭 업계나 경영학에서는 ‘잡 크래프팅(Job Crafting)’이라고 부른다. 뭐 어쩌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를 자본주의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한 또 하나의 정신 승리법 일 수도 있고 노동력을 더 쥐어짜내고 싶은 자본주의의 음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틀꿈틀 꿈꾸기’라고 부르고 싶다.

젊은이들에겐 갈수록 움치고 뛰기 힘들어진 세상이라 한 개인에게 “너만 잘하면 다 이룰 수 있어!”라고 말하기에는 그 말조차 머쓱하다. 꿈꾸는 대로 살수 없다고 꿈조차 안 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꿈꾸는 대로만 살겠다고 이것저것 다 놓아버리기엔 리스크가 너무 큰 세상이 되어버렸다. ‘월급중독’이 나쁜 게 아니다. 밥벌이 고단한 세상에 제 몫하며 월급을 받는다는 건 사실 기특한 일이다. 좀 중독이 되어도 된다. 제 힘으로 돈 벌어서 제 앞가림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직장인 좀비’는 사실 위대한 존재이다.

다만, 꿈과 현실이 꼭 ‘도 아니면 모’의 관계일 필요는 없다는 거다. 내 꿈이 너무 멀리 있다 느껴진다고 지레 좌절할 필요는 없다. 언제나 안테나를 쫑긋 세우고 지금 하는 일에서부터 차근차근 접점을 마련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 또 때론 원래의 꿈은 아니었어도 지금 하는 일에서 새로운 꿈을 찾아 즐겁게 해나갈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사실 계획대로 척척 성공한 사람들보다, 이것저것 닥치는 일을 재미있게 하다 보니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차갑게 식어 있던 좀비 ‘R’의 심장이 다시 뛰는 순간 영화 속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심장이 다시 뛰는 순간 이 곳의 세상이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일단은 꿈틀꿈틀! 그렇게 꿈꾸고, 그렇게 즐길 것! (그런 의미에서 저는 7년째 다 못 쓴 단편 소설을 마치러 가보겠습니다. 슈웅~! 여러분, 다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