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이라는 게 그렇다. 직위와 직급, 직책으로 범벅이 된 위계의 피라미드. 그런데 막상 돌아가는걸 보면 직위나 직급에 따라 굴러가지만은 않는다. 짬밥 많이 먹었다고 꼭 대접 받는 게 아니고, 계급 높다고 꼭 말발이 잘 먹히는 것도 아니다. 그게 실력이든, 혹은 라인을 잘 탔던 아무튼 어디나 명패와 상관없이 ‘실세’라는 숨은 실력자가 있게 마련이고,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있게 마련이다.

[박정선의 살다보니]  ‘직급’ 말고포지션’

사실 큰 조직일수록 촘촘하게 직위나 직급을 만들어 그 균열을 메우고, 사람보다는 시스템으로 굴러갈 수 있는 이런 저런 장치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은 또 다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공식적인 서열을 떠나서 한 개인이 조직 내에서 만들어 내는 자신만의 ‘포지션’이라는 게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서 뿜어내는 아우라(?)라는 게 있게 마련이고. 스스로가 너무 존재감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직위와 직급을 뛰어 넘는 자신의 ‘포지션’이라는 걸 한번쯤 고민해 볼 때다.

때론 사람이자리 만든다.

‘포지션’이라고 써놓고 보니 한창 달아오른 포스트시즌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야구 말이다. 포지션이 딱 다 정해져 있다. 투수, 내야수, 외야수, 포수. 소싯적 롯데빠였던 필자에게는 해태 투수가 선동열로 바뀌는 순간 그 경기는 그냥 끝난 경기였다. 아…졌네. 분명 9명이 하는 경기인데 사람 하나 바뀌면 경기의 흐름이 확 바뀐다.

일자로 된 긴 테이블에 보라색 의자가 쭉 나열되어 있다.

야구야 고작 9명이 하는 거니까, 투수는 원래 중요한 포지션이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꼭 그렇지도 않다. 사실 작은 자리도 어떤 사람이 하냐에 따라 존재감이 달라지는 건 매한가지다. 우리 회사를 예로 들자면 각 부서마다 있는 사무 보조 담당자들이 그렇다. 온갖 잡무를 도맡아서 처리하는 한마디로 우리 부서의 ‘홍명보’ 같은 존재들이다.

재미 있는 건 어떤 친구들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게 있다가 사라져서 얼굴이나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떤 친구들은 마치 그 아이가 없으면 조직이 안 돌아갈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뭐랄까 본부장이나 편집장이 사라져도 이 회사가 잘 굴러갈 거 같은데, 저 사원이 그만두면 회사 그만둬야 할 거 같은 그런 기분. 그런 친구들은 몇 년이 지나도 서로 연락하게 되고 가끔 지나가다 들리면 밥도 사 먹이게 되고, 어떨 때에는 회사 내에나 아는 곳에 좋은 자리가 나면 추천을 하게 되기도 한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고 한다. 어떤 직책이나 자리에 가면 그 자리에 걸맞게 행동하고 움직이려다 보니 사람이 자연스레 역량을 보이거나 변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가끔은 사람이 ‘자리’를 만들기도 하는 거 같다. 그게 어떤 자리든 그 자리를 충실히 해내는 사람은 아무리 작은 자리라도 의미 있게 만들고, 그 ‘자리’의 존재를 재정의하며 더불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도 하니까.

포지션 만들어 내는 , 친화력

그러니까 똑같은 직책에서 똑같은 업무를 하고 있더라도, 개개인의 역량이나 캐릭터에 따라 사내조직 내에서의 포지션(지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때론 그런 지위는 ‘직급’조차 뛰어넘기도 한다. 김 과장의 말은 씨알도 안 먹히는데 이 대리의 말에는 모두가 수긍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기도 하는 거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나름의 특징이 있다.

우선 ‘업무 능력’은 필수다. 뭐 그렇다고 슈퍼 초울트라의 능력자일 필요는 없다. 자기에게 떨어지는 일을 기본적으로 잘 처리해 내고, 자기 일 못해서 남에게 피해를 못 끼칠 정도만 아니면 대부분 오케이다. 정말 실력이 특출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의 ‘포지션’이 확고해지긴 한다.

‘일은 어느 정도 하면서 친화력’이 있는 이들일수록 자신의 포지션을 확실히 하는 경우가 많다. ‘일 잘하고 싸가지 없는’ 캐릭터들은 제 일은 잘할지 모르지만, 아래에선 인심을 잃고 위에서는 경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위태롭기 마련이다.

‘친화력’이라고 해서 사실 뭐 또 대단한 건 아니다. 윗선에 아부 잘하고 정치를 잘한다거나 하는 건 물론 아니다. 회식 자리에서 잘 놀고 동료들을 술자리를 자주 가진다거나 하는 그런 의미도 아니다. 그냥 일종의 ‘오지랖’이다. 이런 친화력은 아무에게나 인사 잘하고, 아무하고나 쉽게 말을 트는 능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이들은 자연스럽게 사내 다른 부서 사람들이나 외부 관계자들과 알게 되고 이런 저런 인간 관계를 트면서 본인이 의식하든 안 하든 그렇게 네트워크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그 네트워크의 허브가 될 뿐 아니라 자기 부서의 게이트웨이가 되어 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팀원이 가서 얘기했을 때는 잘 안 먹히던 일들이 그(혹은 그녀)가 갔다 오면 의외로 수월하게 해결되기도 한다.

여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에게 여러개의 서류를 넘기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친화력이 있는 이들은 또 가만 보면 상대의 얘기를 잘 들어준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긴 해도 일단 다 들어주고 한다. ‘경청의 힘’ 어쩌고 하는 거창한 말을 안 쓰더라도, 일단 사람들과 대화하길 좋아하고 그래서 어느새 누군가의 ‘대나무숲’이 되어 있기 일쑤다. 그리고 자기 힘 닿는 내에서는 어떻게든 도와줄 노력도 하고.

한마디로 오지랖 넓고 잔정 많은 캐릭터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자기만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이들. 그런 이들일수록 어느 정도의 업무 능력을 갖추면, 쉽게 자신의 직급을 뛰어넘는 포지션을 이루어낸다.

인맥 관리말고인간 관계

자…그럼 이 타이밍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을 거 같다. “결국 인맥 관리 잘하는 사람이 친화력 있는 사람인가요?”, “결국 인맥 있는 사람이 자기 직급을 뛰어 넘는 포지션을 만들어내는 건가요?”라고. 그런데 그거 아닌 거 같다. 사실 좀 병적으로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가 ‘인맥 관리’라는 단어다..

‘저 사람과 친해져서 혹은 친해지면 내가 언젠가 이익을 볼 수 있겠지.’라는 의식,무의식의 발로가 ‘인맥 관리’의 시작일 게다. 그래서 그건 굳이 ‘관리’해야 하는 일종의 태스크가 된다. 그러니 하는 사람도 피곤하고, 받는 사람도 은연 중에 느껴져 불편하다. 오히려 그냥 막 대하는(?) 이들이랑 결국은 더 오래 간다. 직급이나 직책을 떠나서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해주는 이들 말이다.

사실 누구하고든 친해지는 게 좋다. 꼭 높은 회사의 고위급이나 갑이 되는 외부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회사 빌딩의 경비 업체 직원, 청소해주시는 어르신들, 컴퓨터 수리해주는 업체 직원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친해두면 다 좋다. 야근할 때 친구가 한 명 더 생기는 거고(밤 12시면 닫는 주차장 문을 아무 잔소리 없이 열어주기도 한다.), 내 책상 밑을 한 번이라도 더 닦아주시고, 어쩌다 보니 우리 집에까지 와서 컴퓨터를 고쳐주기도 한다. 얼마나 고마운가.

사람(人)을 굳이 사이 간(間)자까지 덧붙여가면서까지 인간(人間)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람이란 그 자체로 정의되는 존재인 동시에 사람들 사이(間)의 관계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정의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누군가에게는 차가운 이가 나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누군가에게는 높기만 한 이가 나에게는 스스럼 없는 이가 되기도 한다. 그 사람(人)은 똑같을지 몰라도 그 사람과의 관계(間)를 풀어내는 나의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은 ‘직급을 뛰어넘는 포지셔닝의 노하우’라는 낚는 주제로 시작하였지만, 사실 이 글을 쓴 이유는 “내가 대리인데 과장보다 말발이 먹히고 싶다”는 이들에게 팁을 주겠다는 의도는 아니고, 그럴 깜냥도 없다. 하루 24시간 중 어쩌면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직장 생활, 그 조직 안과 밖에서 생겨나는 인간 관계를 한 번쯤 더 고민해 보았으면 해서 시작한 글이다.

혹시라도 ‘인맥 관리’가 고민이라는 이들이 있다면, 그보다는 ‘인간 관계’에 대해서 한 번쯤 더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하고 노력하다 보면 분명 회사 생활도 더 재미있어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