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가을은 우선 날씨가 좋다. 북반구 지역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하늘은 맑고 높다. 기운은 서늘해서 사람들이 활동하기에 알맞다. 습도가 내려가면서 마른 기운이 자리를 잡으니 피부에 닿는 느낌이 우선 좋다.

중국에서는 秋高氣爽(추고기상)이라는 성어로 표현한다. 가을 하늘의 높고 맑음, 그 기운의 상쾌함을 일컫는 말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에 등장한 뒤 성어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성어가 하나 있다.

가을이라는 계절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다. 하늘(天)은 높아지고(高), 말(馬)은 살찐다(肥)의 엮음이다. 다음을 이루는 성어는 등화가친(燈火可親)이다. 등불(燈火)을 가까이(親) 할 만 하다(可)의 구성이다. 그러니 어쩔까. 좋아진 날씨에 책을 열심히 읽으라는 얘기다.

[한자 그물로 중국漁 잡기] ⑩ 천고마비(天高馬肥)

그러나 이는 한반도와 일본의 버전이다. 원래의 이 성어는 살벌한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을이 오면 기온이 크게 내려간다. 특히 전쟁이 늘 불붙었던 성어의 원래 출발지, 중국의 경우에는 심각했다. 가장 추운 곳인 북쪽 경계 지역의 하천이 얼어붙기 때문이다. 강이 얼어붙으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곳으로 드넓은 초원에서 여름 내내 왕성하게 자란 풀을 뜯어 먹어 튼튼하게 살이 찐 말이 넘어온다. 그냥 말만 넘어오면 횡재(橫財)가 아닐 수 없다. 그 위에 누군가를 태우고 넘어오는 까닭에 큰 문제다. 중국 버전의 성어 표현은 秋高馬肥(추고마비)다.

그 성어의 원전은 북송(北宋) 때 정식 등장했다. 李綱(이강)이라는 대신이 황제에게 “가을 하늘 높아져 말이 살을 찌웠으니 오랑캐가 곧 다시 올 것”이라며 전쟁에 대비하라고 촉구한 발언에서 나왔다. 그에 앞서 당(唐)나라 시에서도 “가을 하늘 높아져 변방의 말이 살을 찌웠다(秋高塞馬肥)”는 표현이 등장한다.

따라서 원래의 이 성어는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 사이의 전쟁을 가리켰다. 수확의 기쁨과 함께 전쟁의 걱정에 젖어야 했으니 북부 중국인에게 가을은 꼭 즐겁지만은 않았다. 오죽하면 가을에 외적의 침입을 막는다고 해서 防秋(방추)라는 단어까지 만들어 냈을까.

가을은 곧 닥칠 상황에 착실히 대비하는 계절

남산 타워를 배경으로 맑은 가을 하늘이 보인다

올해 가을 남산 타워를 배경으로 찍은 가을 하늘이다.
맑고 높아 보이는 가을의 하늘, 그런 분위기를 적은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성어는 원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무서운 말이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 좋은 면이 있으면 그 반대에 들어서는 그늘도 대개 있는 법이다. 그래서 늘 주변의 모든 상황을 자세히 살펴 곧 닥칠 상황에 착실하게 대비해야 좋다. 그런 맥락에서 가을과 함께 떠올려 보면 괜찮은 단어가 추호(秋毫)다.

가을이 오면 털갈이를 하는 게 일반 동물의 특성이다. 번식을 끝낸 조류의 경우 어두운 색깔의 깃털이 새로 돋아난다. 동물들의 가을 털갈이에서 새로 돋는 털은 유난히 작고 가늘다고 한다. 그런 가을 털갈이에서 새로 나오는 터럭을 추호(秋毫)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단어는 ‘아주 조그만 것’ ‘작고 가는 것’ 등의 의미를 다시 얻었다. “추호의 틈새도 허락하지 않는다” 식의 표현은 우리 귀에 익다. 명찰추호(明察秋毫)라는 말이 있다. 눈 밝기(明)가 가을 털갈이 짐승의 작고 미세한 털(秋毫)을 살필 수 있다(察)는 엮음이다.

사물과 상황을 자세히 살피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시비를 걸고 나오는 내용도 있다. 미세한 부분만 살피면 곤란하다는 문제 제기다. 맹자(孟子)의 경우가 그렇다. 가을 터럭은 살피면서도 수레에 실린 큰 덩치의 땔감은 정작 눈으로 보지 못하는 상황을 지적했다. 원문을 적자면 ‘明察秋毫之末, 而不見輿薪(명찰추호지말, 이불견여신)’이다.

크고 작게 모두 잘 살펴야 좋다. 큰 흐름을 놓친 채 디테일만을 건져도 문제고, 하늘만 쳐다보며 걷다가 발을 구덩이에 들여도 문제다. 그 적절성을 이루기가 좀처럼 쉽지는 않다. 크고 작은 모든 변수에 늘 대비하면서 상황을 관리해야 한다.

땅에서 자라난 식생(植生)이 열매를 맺어 그를 숙성시키는 계절이 이 가을이다. 우리도 이 가을에 많은 것을 알차게 익혀야 옳다. 생각도 그렇고 내가 벌였던 일도 그렇다. 주변을 차분하고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큰 흐름을 놓지는 일도 없어야 한다. 차츰 깊어가는 가을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르침도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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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생활 23년의 전(前) 언론인이다. 중앙일보 사회부를 비롯해 국제와 산업,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부문을 거쳤다. 주력 분야는 ‘중국’이다. '연암 박지원에게 중국을 답하다', '중국은 어떻게 모략의 나라가 되었나', '장강의 뒷물결, '지하철 한자 여행_1호선',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 등 중국, 한자 관련 저서 5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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