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림의 일상공작소] 만원 지하철은 강하다

나의 화실은 명동에 있지만, 속한 회사의 사무실은 일산에 있다. 평소 사람이 많은 걸 좋아하지 않아 출근 시간이 지나서 여유롭게 나오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도 회의 시간에 맞추느라 어느 정도 일찍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하철은 이미 만원이다.

고민이다. 물론 일산까지 가는 노선은 광화문을 지나면 어느 정도 한가해지긴 하지만,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한 지하철을 탄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이 꽉 찬 공간, 특히 지하철을 부담스러워하는 나의 심리에는 예전 1년 넘게 직장 생활을 했던 경험 때문이다.

[이림의 일상 공작소] ⑥ 만원 지하철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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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시기에 하고자 했던 게 나름 명확했던 나는 취직에 대한 계획이 없어 자소서 같은 것도 한번 써 본적도 없이 대학을 졸업했다. 물론 졸업하자마자 하고자 했던 게 그렇게 녹녹치 않을 뿐더러 세상을 우습게 본 어린 놈의 자존심 탓에 1년을 백수로 지내야 했다. 자신감은 고갈되고 내가 하찮아 보일 때 쯤 그래도 일은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언론사에 취직하게 됐다. 그때부터 시작된 출근길의 만원 지하철은 그 당시 나에게는 패배의 공간이었다. 나와 같은 시간에 지하철을 꽉 메운 사람들을 보면서 나만 힘든 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자기 위로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업무에 지쳐가고 스트레스성 편두통으로 3일간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을 때 마음 속으로 결정한 것이 있었다.

이제 그만둬야겠구나. 자기 확신도 없이 해류에 쓸려 다니는 해조류처럼 휘청대는 내가 견딜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만화에 대한 갈증도 한몫했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패배감에 만취해 있는 나를 구하는 길은 이 지하철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결국에는 나를 그만두게 했다.

그 당시 나는 견디지 못하고 지하철을 나왔지만, 지금까지 그 안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면 경외감이 몰려온다. 그들은 강하다.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이다. 나는 튕겨져 나왔지만 그래도 계속 그 공간이 가득 찬 이유는 여전히 이 땅에는 강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에 지하철을 탔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지하철은 또 금방 만원이 되었다. 비오는 밖에서 시간을 보낼 곳도 없었고 꽤 오래간만에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쳐 가며 집에 가고 있었다. 손잡이를 잡을 수 없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을까 했지만, 지하철이 꽉 차있던 덕분에 그럴 걱정은 없어 보였다.

뭔가 의지가 되었다. 넘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강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어서 그랬나 싶다. 물론 집에 도착했을 때 정말 다시는 만원 지하철을 타지 않겠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그 공간이 그렇게 많이 답답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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