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의 전령사, 단풍(丹楓)

어느 한 궁녀, 어느 한 서생(書生). 궁에 오래 갇히다시피 살았던 궁녀는 맑은 가을날 빨간색 낙엽에 글귀를 끼적인다. 궁녀로서의 답답한 삶을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이어 궁궐 해자(垓字)의 물에 띄워 보낸다. 해자 주변을 서성이던 서생은 그를 우연히 주워 읽는다. 역시 낙엽에 감상을 적어 물에 띄운다.

[한자 그물로 중국漁 잡기] ⑪ 단풍(丹楓)

누가 받아볼지 알 수 없는 글쓰기였다. 궁녀는 어느 날 신분의 족쇄를 벗는다. 궁녀 ‘정리해고’ 명단에 ‘다행히’ 이름이 올랐던 모양이다. 서생도 어느 권세가의 참모를 지낸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둘은 부부로 맺어진다. 그 과정은 복잡해서 다 적지 않는다. 어느 날 과거를 회상하던 둘이 낙엽에 적었던 시를 이야기하다가 깜짝 놀란다. 그리고선 간직했던 낙엽을 꺼내고, 기적과 같은 인연을 떠올린다.

20141112 가을 깊어짐

지난해 11월 촬영한 남산의 단풍 숲. 빨강이 많이 보여 숲이 마치 불 타오르는 듯 화려하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만나고, 인연 없으면 얼굴을 마주해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중국의 오랜 속언이다. ‘有緣千里來相會, 無緣見面不相識(유연천리래상회, 무연견면불상식)’이라고 쓴다. 부부로 만나 살아가는 사람들 인연이라는 것이 이처럼 공교롭다. 이 이야기는 성어로 남았다. 紅葉題詩(홍엽제시)다. 빨강(紅)의 이파리(葉)에 시(詩)를 쓴다(題)의 엮음이다.

깊어가는 가을의 전령사, 단풍(丹楓) 

가을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따르는 소품이 바로 위에 적은 붉어진 잎사귀, 즉 홍엽(紅葉)이다. 우리는 그렇게 가을이 닥쳐 빨강과 노랑, 적갈색, 주홍, 주황 등으로 변하는 식물의 잎을 흔히 단풍(丹楓)으로도 부른다.

여기서 단풍(丹楓)은 빨갛게 물이 드는 단풍나무과(科) 단풍나무속(屬)의 나무들을 일컫기도 하지만, 잎의 색깔이 바뀌는 일반 나무들이나, 그런 현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고유적인 이름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명칭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가을과 나무의 잎사귀는 매우 인연이 깊은 관계다.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닥치면 먼저 반응을 보이는 게 식생(植生)들이다. 초록은 야위고, 울긋불긋한 여러 색깔이 드러난다. 시든 풀잎과 나무 잎사귀에 메마른 바람의 소리가 섞이면서 가을은 깊어진다.

일엽지추(一葉知秋)라는 성어도 꽤나 유명하다.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말로 “잎사귀 하나 떨어지니 해가 저무는 것을 알겠다(見一葉落而知歲之將暮)”라는 구절에서 나왔다.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떨어지는 낙엽 하나로 읽는다는 얘기다. 커다란 조짐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한 현상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조그만 징조를 놓치지 않고 봐서 알아내는 능력, 나아가 조그만 것에서 큰 흐름을 정확히 읽는 행위 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성어다.

그래도 단풍이 드는 나무의 잎사귀들은 가을의 가장 뚜렷한 전령사다. 앞서 적은 홍엽(紅葉)은 그 중의 극히 작은 일부다. 단풍의 하나로서 은행나무 잎은 황엽(黃葉)을 이룬다. 엽록소의 성장이 멈춘 뒤 제가 지닌 색소의 종류에 따라 빨강이나 노랑, 적갈색 등으로 변한다.

낙엽을 밟으며 사색에 잠기는 계절

그냥 떨어지는 잎사귀의 모든 것은 낙엽(落葉), 물기가 빠져 말라비틀어지는 것은 고엽(枯葉), 단풍나무의 고운 잎은 풍엽(楓葉), 서리 맞아 울긋불긋한 색깔로 변하는 잎은 상엽(霜葉)이다. 운치 있는 단어도 보인다.

답엽(踏葉)이다. 우수수 흩어져 내린 여러 색깔의 낙엽들을 밟는 일이다. 가을에 깊어지는 사색(思索), 그를 돕는 가을 길의 산책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다. 필자가 자주 걷는 남산 산책길은 가을 낙엽이 한창 떨어질 때 일부러 그를 치우지 않는다. 낙엽을 밟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보라는 취지에서일 것이다.

그렇게 어느덧 가을이 깊어져 모든 산에 단풍이 가득 차면 떠올리는 성어가 하나 있다. 바로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온 산에 붉은 잎이 가득 찼다는 얘기다. 그러나 홍엽만이 전부는 아닐 테다. 노랑과 갈색, 적갈, 주홍, 주황 등이 어울리면서 가을의 정취는 크게 불어난다.

정안홍엽(征雁紅葉)이라는 말도 있다. 먼 길 떠나는(征) 기러기(雁), 붉은(紅) 잎사귀(葉)라는 엮음이다. 역시 가을의 정경을 말해주는 성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늦가을의 풍경은 만추가경(晩秋佳景)이다. 우리가 지금 맞이하는 가을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다.

 

유광종 아바타Opinions 벳지

기자 생활 23년의 전(前) 언론인이다. 중앙일보 사회부를 비롯해 국제와 산업,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부문을 거쳤다. 주력 분야는 ‘중국’이다. '연암 박지원에게 중국을 답하다', '중국은 어떻게 모략의 나라가 되었나', '장강의 뒷물결, '지하철 한자 여행_1호선',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 등 중국, 한자 관련 저서 5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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