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대나무숲'을 걷다

최초로 트위터에 ‘대나무숲’계정을 만든 이가 선언문을 쓴다면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지금 트위터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대나무숲’이라는 유령이…..”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겠지. “잃을 것은 핍박이요, 얻을 것은 자존감이다. 만국의 ‘을’들이여, 단결하라!”라고…

언제부터인가 온갖 ‘대나무숲’으로 시끌시끌해진 트위터의 타임라인. 어느 출판사 직원 한 명이 익명의 공동 계정으로 만든 ‘출판사 옆 대나무숲’이 그 시작이었다. 업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계정의 비밀번호를 공유하고, 그들만의 애환과 불만을 토로하며 서로 공감하고 토닥이는 장이 생겨난 거였다. 그리고 뒤이어 이 땅의 핍박 받는 젊음과 직장인들은 하나 둘 자신만의 대나무 숲을 만들기 시작했다.

[박정선의 살다보니 1회] 직장인, ‘대나무숲’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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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이 피었습니다

그렇게 피어나기 시작한 대나무숲들은 그 종류가 참 다양도 했다. 출판사 옆 대나무숲(twitter.com/bamboo97889), 우골탑 옆 대나무숲(twitter.com/bamboo1905), 디자인회사 옆 대나무숲(https://twitter.com/bamboo20120913), 홍보회사 옆 대나무숲(twitter.com/bamboo98765) 등등. 그리고 참 서글프게도 이 대숲들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열정노동자와 20대의 청춘들을, 그리고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실상은 비정규직인 이들을 이런 저런 핑계로 착취하며 오히려 큰 소리 치는 이들이 바글바글한 세상 말이다. ‘시월드 옆 대나무숲’, ‘백수 옆 대나무숲’ 같이 직업이나 직종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동병상련하는 이들끼리 모여 만든 대나무숲들 또한 마찬가지다. 거창하게 가부장제니 세대갈등이니 하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그 안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얘기들이 담겨 있어, 오히려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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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직업과 관련된 대나무숲의 계정들을 보면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이들이 많거나 대부분 회사(조직) 크기가 작고 그 숫자는 많아서 같은 직종이나 처지의 사람들 함께 목소리를 모으기 힘든 직군들이 많다. 출판계, 영화계, 대학 연구소 등의 이야기를 다룬 대나무숲들이 가장 활성화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대나무숲들을 그렇게 서로 하소연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힐링’의 코드로 해석하거나 일종의 ‘고민 해방구’라며 치켜세우지만, 그렇게 미화하기엔 씁쓸하기만 하다. 오히려 그냥 막바지에 몰린 이들이 ‘사이버 망루’에 올라 외치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너무도 확고한 현실의 권력관계 앞에서 차마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이 SNS에나마 대고 외치는 절규, 그렇게 들리더란 말이다.

내 안의 ‘을’을 위하여…

저 수많은 대나무숲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왠지 남의 일 같지 않다. 내가 그런 핍박을 겪어서가 아니라, ‘출판사 옆 대나무숲’, ‘홍보대행사 옆 대나무숲’ ‘디자인 회사 옆 대나무숲’ 등 관련 업계 종사자들 하소연 속에 나오는 진상 저자, 진상 기자, 진상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혹시 내가 저랬던 건 아니었을까?” 싶어 뜨끔해서다.

그러게 말이다. 어쩌다 보니 책 한 권 냈을 뿐이고, 또 어쩌다 보니 그닥 잘나빠진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직업 뒤에 ‘님’자가 따라붙는 기자질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일한답시고 본의든 아니든 그 시덥지 않은 소소한 권력으로 누군가를 쪼고 괴롭히고 잘난 척 나대고 있었던 거다. 다들 그렇다. 잘나면 잘난 만큼, 여기저기 ‘갑’노릇 할 일도 많고, 스스로 아무리 못나다고 생각해도 어디 한 군데 가서는 또 ‘갑질’을 하고 있다. 그러니 저 대숲에 하소연을 하는 이들은 그 피라미드의 말단에서 어디 가서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이들일 것이다. 아마도 진정 필요한 것은 ‘대나무숲’이 아니라, ‘신문고’인 이들 말이다.

사실 좀 궁금하다. 대나무숲에 나오는 그 숱한 개념 없는 어디어디의 사장, 이사, 실장, 어디 교수, 감독 등등 하는 이들. 만약 그 타이틀 다 떼놓고 그 알량한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 그냥 어디 무인도에 단 둘만 남아, 그래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을 때의 그들은 어떤 모습일지 말이다. 뭐 다들 악한 사람들이 아닌 거 안다. 위에서는 성과로 쪼고 밑에서는 치고 올라오고, 일은 또 정신없이 많아서 전화 벨만 울려도 짜증이 나고… 그래서 그러는 거겠지.

근데 그럴수록 다들 마음 속에 자신만의 ‘을’ 한 명쯤은 키웠으면 좋겠다. 대나무숲의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인다는 건 그런 의미이다.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과 위치를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와 함께 부대끼고 혹은 사회 생활을 하는 이들의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트위터가 무료로 해주는 ‘나 자신에 대한 모니터링’ 말이다.

그 대나무숲에서 들려오는 말도 안 되는 일들에는 공분하며 ‘나라도 저러지 말아야겠다’고 느끼고 ‘아, 혹시 나도 저랬던 건 아닐까?’라고 되짚어보는 건 어쩌면 타인을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건 오히려 우리 스스로가 그 대나무숲의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한 작은 안전판이지 않을까. 여러분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여러분만의 ‘대나무숲’을 갖고 계신가요?

(아….이 와중에도.. “어이~ 박기자! 원고 마감도 못 지켜서 애먹인 주제에 이런 글 쓰면 안 오글거리냐?”라고 내 안의 ‘을’이 또 한 번 핀잔을 준다.;;;)

박정선 아바타Opinions 벳지

본의 아니게(?) 패션지와 웹진에 몸담으며 공연, 음악, 연애, 섹스, 여행, 커리어 등등의 글을 써대며 8년간 밥벌이를 해왔다. 벤처 스타트업에서 잠시 마케팅을 했고, 지금은 온라인 커머스 기업에서 콘텐츠를 고민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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