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歲暮)

벌써 해가진다. 봄물이 시리게 차오르는 연못가의 파릇한 풀을 본 날이 엊그제 인듯 한데, 벌써 섬 돌위를 구르는 오동잎은 가을을 알렸다. 그런 가을도 쏜살처럼 후딱 지나가더니 차가운 눈, 한설(寒雪)이 내려 겨울이 닥쳤음을 알렸고 이제는 마침내 한 해의 끝이다. 시간의 흐름은 이처럼 빠르기만해 촌각의 시간도 가벼이 다룰 수 없다면서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이라는 성구도 만들어 냈다.

[한자 그물로 중국漁 잡기] ⑬ 세모(歲暮)

“歲歲年年人不同(세세년년인부동)”이라는 말이 있다. 옛 시구에서 먼저 나온 뒤 후대의 중국 시단에서 즐겨 썼던 말이다.

풀자면 “해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뜻이다. 앞 구절에는 “해마다 피는 꽃은 서로 비슷해도(年年歲歲花相似)”라는 말이 등장한다. 세월이 흘러도 경물(景物)은 변함이 없지만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의 모습은 나날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는 우리 옛 시조가 떠올려지는 대목이다. 그렇게 시간은 꾸준히 지나가고, 사람의 인생은 덧없이 흘러간다. 2015년의 시작을 알린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밑, 즉 세모(歲暮)에 이르렀다.

New Year clock moments before midnight.

해를 가리키는 한자어는 年(년), 歲(세), 載(재), 祀(사) 등이 있다. 年(년)은 농작물 수확을 가리키는 글자로 처음 등장했다. 따라서 한자 단어 중 유년(有年)은 풍년, 대유년(大有年)은 대풍(大豊)을 가리킨다. 가을걷이, 즉 농작물 수확으로 1년이 지나감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해’라는 뜻을 얻었다.

歲(세)는 원래 太歲(태세), 즉 태양계 행성의 하나인 목성(木星)을 가리켰다.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주기가 11.86년이다. 지구에서 볼 때 매 해마다 특정한 구역에서 머물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목성의 위치를 견줘 해를 따졌다고 한다.

載(재)는 물건 등을 ‘싣다’의 뜻이다. 정확하게 어떤 이유인지는 추정키 어렵지만, 이 글자 또한 ‘해’라는 뜻을 얻었다. 천년에 한 번 맞을까 말까하는 기회를 이야기할 때 ‘千載一遇(천재일우)’라고 적는 경우다. 祀(사) 역시 원래는 ‘해’의 뜻이었으나, 나중에 왕조 차원이나 개인 가정에서 벌이는 ‘제사’의 뜻이 매우 강해져 지금은 쓰지 않는 편이다.

역대 중국의 최고 시인이라고 하는 이백(李白)은 이런 말을 남겼다.

따옴표-3“무릇 하늘과 땅이라는 존재는 만물이 거치는 여관이요, 시간이라는 것은 영겁을 스쳐가는 나그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

라고 말이다.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인다.

장자(莊子)가 인생을 바라보는 눈길도 다르지 않다. 그는

따옴표-3“하늘과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란 마치 좁은 문틈으로 하얀 말이 지나가는(白駒過隙) 모습을 보는 듯하다”

고 했다. 조그맣게 벌어진 문틈으로 하얀 말이 지나가는 속도야 그야말로 순식간(瞬息間)이다. 눈 감았다 뜨고(瞬), 들숨 날숨 한 번 들었다 나가는(息) 사이(間) 말이다.

매우 낭만적이었던 시인 이백(李白)은 “그러니 옛 사람이 촛불 켜들고 밤새 노닐었던 일은 다 이유가 있음이라”며 실컷 놀기를 권유한다. 촛불 켜들고 밤새 노니는 일은 한자로 秉燭夜遊(병촉야유)다. 전깃불로 밤이 대낮처럼 밝은 현대 사회라 치더라도 그렇게 마구 밤길을 떠도는 일은 삼가는 게 좋다.

주저 앉았다가도 훌훌 털고 일어나 길을 가는 게 인생이다. 휙~스쳐간다고는 하지만 인생은 등에 큰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일이다. 한자로 적으면 負重致遠(부중치원)이다. 짧은 인생, 시간 탓만 하고 있기에는 어딘가 허전하기 짝이 없다.

올해 세밑도 마찬가지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세제(歲除)라고 적는다.

수평선 위로 빨간 태양이 지는 모습

벌써 한 해가 진다.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절감하는 때가 세밑, 즉 세모(歲暮)다. 일몰의 장엄한 풍경이 세밑에 접어든 우리의 심사를 말해준다.

여기서 除(제)는 ‘가다’ ‘바뀌다’의 뜻이다. 해가 바뀌는 마지막 날에 적합한 표현이다. 그 날 밤은 그래서 除夕(제석), 除夜(제야)라고 적는다. 밤새 뜬 눈으로 조심스레 해의 바뀜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중국에서는 守歲(수세)라고 부른다. 취기(醉氣)에 휘감겨 새해를 맞이하는 일은 어설프다. 조용하게, 숙연하게 떠나는 해를 보내면서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할 일이다.

유광종 아바타Opinions 벳지

기자 생활 23년의 전(前) 언론인이다. 중앙일보 사회부를 비롯해 국제와 산업,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부문을 거쳤다. 주력 분야는 ‘중국’이다. '연암 박지원에게 중국을 답하다', '중국은 어떻게 모략의 나라가 되었나', '장강의 뒷물결, '지하철 한자 여행_1호선',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 등 중국, 한자 관련 저서 5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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