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뛰는 소리를 녹음한 적이 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 <심장 보관소>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전시장 한 구석에 마련된 방에서, 나는 내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청진기를 댔다. 이렇게 녹음된 소리는 일본 나오시마 베네세 예술단지 소유의 테시마 섬에 보관된다고 한다. 나는 녹음된 소리를 CD에 넣어 집으로 가져왔다. 그날 새벽,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녹음된 내 심장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심장은 두근, 두근 뛰는 게 아니라 두근, 둑두근, 제멋대로 뛰었다. 내가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듯이. 살아있다는 건 늘 예측불허라는 듯이.

북 칼럼니스트 박사의 추천 도서 ① 두근두근 내 인생 – 김애란 

심장이 뛴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명료한 대답이다. 그에 덧붙여, 김애란은 심장소리가 “되고 싶어지”게 만드는 “누가 들어도 참으로 선동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리듬”이라 말한다.(32p) 뱃속에서 자라나는 아이에게 어머니의 심장은 “오동통한 달”이다. 그 심장소리에 자신의 심장소리를 맞추며 아이는 자라난다. 이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심장이 뛰면서 시작해서 심장이 멈추면서 끝난다. 소설 내내 심장소리는 오동통한 달처럼 페이지 위에 떠 이야기 전체에 리듬을 얹는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가슴 뛰는 순간을 바래왔다. 사랑에 빠졌을 때, 기대감에 부풀었을 때, 격앙되었을 때, 흥분되었을 때.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심장은 늘 두근두근 뛰고 있다.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심장이 늘 뛰고 있다는 것,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뛰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타인을 통해서만 느낀다. 타인과 힘껏 포옹을 할 때 우리는 그동안 안 들렸던 심장 뛰는 소리를 듣는다. 내 심장인지 그의 심장인지, 혹은 두 개의 심장이 만나서 같이 반응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가슴 안 쪽에 자리잡은 조막만한 생명유지장치에 귀를 기울인다. 두근두근,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책 '두근두근 내 인생' 겉표지 사진

심장이 뛰는 시간은 삶이 지속되는 시간이다. 이 작품은 삶의 처음과 끝, 늙음과 젊음과 어림에 대해서 얘기한다. 지나치게 어리다는 건 무엇일까. 지나치게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열일곱에 아이를 낳은 어린 부모. 이미 열일곱에 노인이 된 조로증 환자인 아이. 그들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어림은 부각되고, 이미 너무 늙었기 때문에 늙음은 도드라진다. 그 둘은 바투앉아 서로의 뺨에 얼굴을 댄다. 서로에게 데이는 줄도 모르고. 늙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질문을 받은 조로증 환자인 아이, 아름이는 우연히 들은 한 ‘누나’의 말을 옮긴다. 그 누나는 자신보다 두세배는 나이가 많은 교수를 좋아한다. 그 누나는 술에 취해서 우연찮게 그 교수의 뺨을 만지고서는, 깜짝 놀라고 만다. 늙음에 데인 것처럼. 탄력없고 흐물흐물한 뺨은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던 ‘늙음’에 대한 구체적인 물증이다. 삶이 노화의 과정 그 자체였던 아름이는 사람들이 늙음에 대해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여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남다른 병으로 인해 남다른 삶을 산 아름이는 그래서일까, 지나치다 싶을만큼, 어른스럽다. 아름이는 어째서 이렇게 어른스러울까. 이 아이는 어쩌다 이렇게 일찍 어른이 되었을까. 몸이 늙는다고 해서 마음도 따라 늙으라는 법은 없다. 어른스러움은 시간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아름이는 그에 대해, ‘고통받은 시간’을 말한다. 아플 때의 시간은 너무 길게 느껴지고, 그렇기 때문에 ‘주관적인 시간’으로 따지자면 오래 산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아름이 앞에서 당황하는 것이겠지. 노인의 외모 안쪽에 자리잡은 아이 때문에. 아이의 나이 안쪽에 자리잡은 어른 때문에.

 

작가 김애란 사진

그러한 아름이의 상황을, 작가는 높은 산에 비유한다. “그 산들은 너무 높아서, 고도별로 다른 꽃이 핀다고. 같은 시간, 한 공간 안에서는 절대 살 수 없는 식물들이 공존한다고 말이야. 그곳에는 사계가 함께 있어, 여름에도 겨울이 있고, 가을에도 봄이 있대. 무슨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말이야.”(184p). 실제로 그렇다. 아름이의 어른스러움, 아름이의 아이다움, 아름이의 감춰진 젊음은 높은 산의 이름을 얻는다. 비교적 짦은 생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들을 작가는 산의 형태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가장 높고 가장 작은 산일테다.

이후로도 삶은 지속된다. 이후로도 심장은 계속 뛴다.

그 삶이 내 삶이 아니고, 그 심장이 내 심장이 아닐 뿐이다. 아름이보다 삶이 긴 ‘평범한’ 다른 사람들은 그 기나긴 삶을 살아가기 위해 기회를 찾고 기회를 얻는다. 아름이의 부모는 또 다른 평범한 아이의 부모가 될 것이고, 아름이의 친구인 장씨 아저씨는 쉽지 않겠지만 어쨌든 또 다른 친구를 사귈 것이다. 아름이를 속인 남자는 시나리오를 쓸 기회를 얻겠지. 하지만 그 삶들에 비유해 아름이의 삶이 지나치게 짧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의 삶이 지나치게 길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삶에 ‘지나치게’라는 표현을 붙일 수나 있는 것일까.

각각의 심장은 각각의 수명만큼 살다가 멈춘다. 그 하나하나의 심장을 위한 묘비명은, 또 각각 온전한 문장일 것이다. 지나치게 길지도, 지나치게 짧지도 않은 온전한 문장. 내 심장소리는 일본의 낯선 섬에 가 있다. 얇게 박제된 채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심장소리와 섞여 있을 것이다. 다른 심장소리들과 재잘재잘 수다떠는 것을 상상하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은 여기, 나, 이곳이니까. 그곳에 있는 것은 플레이 순간에만, 그 만큼만 재생되는 삶의 흔적이다. 앙상한 소음이다. 심장소리가 오동통한 달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이 되는 여기, 이곳에서, 나는 지나치게 어리지도, 지나치게 늙지도 않은 시간들을 쌀 씻듯 부대끼며 살아낸다. 가끔, 다른 이의 심장소리에 귀 기울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