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읽고자” 하는 노력은 참 집요하다. 그림을 보이는 그대로 보고 끝내는 게 꽤나 아쉬운 모양이다. 그림 하나하나의 역사와 의미를 짚어보다 못해, 주제별로도 묶어보고 소재별로도 엮어본다. 책 읽는 여자들을 그린 작품들만 모아놓은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슈테판 볼만), 인간 마음에 자리 잡은 일곱 가지의 공포를 반영한 그림들을 묶은 <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나카노 교코), 그림 속의 남성성을 찬찬히 들여다본 <남자, 그림이 되다>(가브리엘레 툴러) 등 관심을 기울이면 재미있어 보이는 책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그럴 법도 하다. 그림 이면의 이야기들을 들춰보면 겹겹이 쌓인 게 깊디깊으니까. 그것을 알고 보면 그림이 또 다르게 보이니까. 그림이 그저 표피 한 장으로 끝났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리 만무하지 많을까. 다시 봐도 색다르고, 알고 보면 더 색다른 게 좋은 그림이 가진 매력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색으로도 이합집산, 모아본다. 색이 제 입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어떨까.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우리는 색이 제 입으로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빨강은 말한다. “당신들이 던지는 질문을 들었다. 색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색은 눈길의 스침, 귀머거리의 음악, 어둠 속의 한 개 단어다. 수천 년 동안 책에서 책으로, 물건에서 물건으로 바람처럼 옮겨 다니며 영혼의 말소리를 들은 나는, 내가 스쳐 지나간 모양이 천사들의 스침과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빨강이 무엇인가. “자네는 한 번도 빨간색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빨강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하겠나?” 대답이 들려온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면 그 느낌이 철과 동의 중간쯤 되지.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뜨거울 테고. 손으로 쥐어보면 소금기가 아직 남아 있는 물고기처럼 느껴지겠지. 입에 넣으면 입안이 꽉 찰 테고 냄새를 맡으면 말 냄새가 나겠지. 꽃의 향기로 치면 붉은 장미보다는 국화 향기와 비슷할 걸세.” 페르시아의 한 도시에서 장님 세밀화가 둘이 나누는 대화다. 그렇게 오르한 파묵은, 빨강을 시각적으로, 촉감적으로, 청각적으로, 후각적으로 우리에게 들이밀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책, 오은의 <너랑 나랑 노랑>을 읽으며 그 느낌을 되새긴다.

북 칼럼니스트 박사의 추천 도서 ③ 너랑 나랑 노랑 – 오은

'너랑 나랑 노랑' 책 겉표지 사진

오은은 이 책, <너랑 나랑 노랑>에서 그림을 여섯 가지 색을 기준으로 분류한다. 빨강, 파랑, 하양, 노랑, 녹색, 검정색의 그림들이 줄을 선다. 저자는 시인이다. 시인의 언어로 색에게 색을 입힌다. 화가의 말을 대변하기도 하고, 그림 속의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고, 색의 본성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의 말을 읽고 페이지를 앞으로 넘겨 그림을 보면 처음 보았던 그림과는 다른 그림이 놓여있다. 이야기를 입은 그림은 이전의 그림이 아니다. 마법 같다.

책이 펼쳐져있는 사진 1

저자는 색을 가지고 논다. 그와 동시에 말을 가지고 논다. 이런 식이다. “원형극장에서는, 날지 못하는 비극, 박제가 된 산, 입구를 버린 동굴, 동굴 안에 들이치는 한줄기 푸른 빛, 나뭇잎과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푸른 달빛, 환상이라는 말, 환상이라는 거짓말, 거지가 품는 환상, 환상적인 굴뚝, 굴뚝에서 태어나는 쥐, 쥐들의 방정맞은 울음….(중략)…..풀리지 않는 저녁의 수수께끼들이 라이브로 펼쳐지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아른하임의 영토>를 설명하는 글이다. 그림의 꼬리를 물고 글이 나오고, 글의 꼬리를 물고 또 다른 글이 나온다. 그림을 통해 연상된 것이 글로 토해지고, 연상작용은 글의 몸통 안에서도 쉼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서 논리 정연한 지식을 얻으려는 시도는 버릴 것. 읽다보면, 결국 이 모든 말들은 색을 보지 못한 이에게 색을 설명하려는 페르시아의 장님 세밀화가의 시도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색을 상상하고, 만져보고, 냄새 맡고, 입에 넣어보라. 그 이후에 그림을 다시 본다면, 그것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책이 펼쳐져있는 사진 2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가 스스로를 색으로 표현한 자기소개를 다시 읽어보자. “어릴 적에는 회색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갈피를 못 잡고 언제나 오락가락 정신없었다”로 시작하여, 그는 자신과 색의 관계를 차근차근 풀어낸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원색은 좋아했지만 원색적인 말은 싫어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개중 빨간 펜이 가장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고유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색다르게 사는 법이 필요한 때가, 또다시 찾아든 것이다.”와 같은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그에게 있어 색이라는 것이 그저 화판 위의 물감이 아닌, 삶 그 자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색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그림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리라. 색에게 입술을 주고, 색에게 성대를 주고, 색의 단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노란색에 대해 읽을 때 우리는 노래지고, 빨간색에 대해 읽을 때 우리는 빨개진다. 그렇게 내가 보고 있는 것과 내가 겹쳐지는 순간. 그것을 그는 아마도, <너랑 나랑 노랑>의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