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3가 출시됐다. 집이 왕십리와 멀지 않아 소장판을 욕심내봤지만 헬게이트가 되어가는 왕십리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듣고 체력적 한계가 걱정되어 그만뒀다. 악마를 잡아 세상을 구하자는 마음이 그들보다는 적었으니 어쩌겠는가.

다음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근처 마트로 아침일찍 가봤다. 아직 열지 않은 입구가 사람들로 좀 소란스럽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전날 밤부터 기다린 무리들이 둘 있었는데, 누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나하는 일로 서로 신경이 날카로웠고 중간에는 마트 관계자가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서로의 팀은 자기들이 더 일찍 와서 기다렸으니 우선권이 있다는 논리로 누가 먼저 왔는지 확인해야한다는 얘기로 고성이 오갔고, 어느 팀이 먼저 왔는지 알리가 없는 마트 관계자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심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지만 어떤 결정이 날지 흥미가 생겨 계속 지켜보는 중이었다. 고약해져가는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길거리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면서 지나갔다. 문득 나도 모르게 소장판을 기다리기 위해 밤샘을 했던 그들과 같은 무리로 보일까봐 빨리 그 자리를 벗어 났다.

이게 문제다.

만화 이미지1

내 성격 중 마음에 안드는 것을 하나 꼽는다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흔한 취미생활에 남의 눈치를 본다는 거다. 만화를 보는 것도 그랬고, 장난감을 모으는 것도 그랬다. 어렸을 적 만화방과 오락실은 사회악이라는 편견이 강했다. 오락실에서 친구들과 게임을 하다가 엄마의 등짝스매쉬를 맞고 끌려가는 친구들도 여럿 봐왔고, 몰래 만화책을 모았다가 어느날 몽땅 사라져버린 사실을 깨닫고 어린 나이에 심한 배신감도 느껴봤었다. 지난 날에 대한 반발심이었는지 성인이 되고 독립을 했을 때는 예전보다 왕성한 취미생활을 보였지만, 내가 즐겨 하던 것들은 몰래 숨어서 해야하는 무언가였던 탓에 난 여전히 지하철이나 버스, 또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공공장소에서 만화책을 잘 보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이 쌓여서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딱히 부끄러울 필요도 없는 일상 생활의 취미에 눈치를 보게 되는 비상식적인 어른이 됐다.

예전에 사진에 취미를 붙인적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꽤 고가의 취미이기 때문에 부담도 되긴 했지만, 가끔 하나씩 늘려가는 렌즈나 잘 나온 사진을 인화했을때 즐거움은 컸다. 좀 더 사진을 잘 찍고 싶어서 동호회 사람들과 자리를 많이 가졌었는데, 한분은 카메라 장비가 무거워 차를 샀다는 분도 계셨다. 물론 정말 장비가 무거워 차를 사셨겠냐만, 자동차 구입에 대한 이유중 하나가 사진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한 듯 했다. 너무 요란스러운 것 아니냐는 핀잔도 있었지만, 그 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일이던 한번 하기로 했으면 저 정도는 되야하지 않겠냐 싶었다. 몇 년 사진을 찍다가 이젠 한두개 남아버린 렌즈와 자료사진이 필요하거나 여행을 갔을 때 소소하게 찍는 정도가 됐다. 동호회 자리도 안 나간지 오래 되었지만 아마 그 분은 여전히 멋진 사진을 찍고 계시리라.

만화 이미지2

“나의 취미 생활은 이런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상대를 이상하게 보거나 얄팍한 편견으로 폄하의 말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어떻게 이해가 되겠나. 같이 즐길 수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해하지 말고 그냥 인정하자. 그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평소보다 일찍 화실에 도착해서 그냥 마음 편하게 디지털 상품을 구매했다. 소장판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날부터 기다린 그들보다 내가 열정이 부족했던 탓이니 당연한 결과다. 많은 뉴스에서 요란스러웠던 왕십리 행사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지만 한번 쯤 어떤가. 누구 말대로 샤넬에서 12년만에 백을 만들고, 리들리 스콧이 33년만에 에일리언의 프리퀄을 만들었으니 이쪽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은 흥분해도 괜찮지 않은가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