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미국에서 트롬 세탁기 출시를 앞두고 컬러 품평을 하던 날이었다. 컬러 시안은 모두 다섯 종류. 결정권을 가진 바이어들이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풋! 이게 웬일인가? 정확히 의견이 5등분으로 갈렸다. 컬러란 이처럼 각자의 ‘입맛’처럼 다양하다. 모두가 동의하는 좋은 컬러, 나쁜 컬러란 없다. 모든 컬러가 정답이기도 하고, 모든 컬러가 정답이 아니기도 한 것이다.

다섯 종류의 컬러 시안 사진
“남 주임~ 요즘 가장 뜨는 핫 컬러가 뭐야?”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이번 신상품 디자인에 어떤 컬러가 좋을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절대로 ‘어떤 컬러’라고 말하지 않는다. 꼭 집어 말했다가 시장에서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아니다, 전~혀! 그러면 왜? CMF 디자인, 그러니까 컬러(Color), 소재(Material), 표면 처리(Finish) 디자인을 하고 있는 나에게 ‘컬러’란 복합적이고 유기적이다. 제품 컬러는 단순히 컬러 하나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의 형태, 표면의 재질, 트렌드와 패턴 등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제품 이미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생활 가전을 예로 들어볼까? 우리는 생활 가전을 왜 여전히 백색 가전이라고 불렀을까? 빙고! 그 시절 모든 생활 가전 제품은 백색 일색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접어들어서야 색을 넣은 컬러 가전이 나왔고, 2005년을 전후해서야 무늬를 넣은 패턴 가전이 나왔다. 둘 다 모두 고정 관념을 탈피한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디오스와 프라다폰 사진
파격적인 컬러의 아트 디오스와 블랙 컬러의 프라다폰

그리고 이 무렵에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결합한 ‘컨버전스 디자인’ 제품들이 출시되었는데, 아트 디오스, 휘센 갤러리, 프라다 폰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트렌드를 꼼꼼하게 모니터링하여 제품 이면에 특정한 감성적 스토리를 담은 것으로 이 제품들은 지금도 LG전자의 대표적인 히트 디자인으로 남아 있다.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한 요리사의 심정으로
트렌드를 모니터링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트렌드를 주도하는 전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파리의 메종 엣 오브제 (Maison et Objet)나 밀라노 가구쇼 (Salone Internazionale del Mobile) 등의 전시 정보는 그 양과 질에 있어서 디자이너에게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힘든 것은 정보를 구하고서부터다. 넘치도록 방대한 전시 정보를 통해 트렌드를 읽고 내 프로젝트에 적용해야 하는 데, 이때 디자이너의 마음은 메뉴와 재료를 정한 뒤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해 요리법을 고심하는 특급 요리사의 심정과 같아진다.

 

밀라노 가구쇼 전경
밀라노 가구쇼 전경
휘센 스탠드형 에어컨 사진
휘센 스탠드형 에어컨

나의 경우 이때부터 트렌드 재해석 작업에 집중한다. 디자이너가 맛깔 나게 ‘디자인’하려면 고객의 입맛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트렌드 정보가 전반적인 메뉴와 재료의 경향을 알려 준다면, 트렌드 재해석은 타겟으로 삼은 시장의 ‘입맛’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과정이 된다.

디자인 궁합과 스토리
‘퍼플’ 컬러를 예로 들어 보자. 퍼플 계열의 컬러는 유럽에서는 ‘고귀한’ 느낌을 준다. 왕권을 연상시키는 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우울하고 동성애적인 코드를 연상시킨다. 반면, 일본에서는 밝은 라벤더 계열의 퍼플은 ‘사쿠라(벚꽃)’ 색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니까, ‘퍼플’이라는 컬러는 제품이나 포지셔닝에 따라서 다양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럴 땐 그러면 어떻게 소화하는 것이 좋을까? 나는 이 지점에서 ‘이야기(스토리텔링)의 힘’을 믿는다.

최근 한 자동차 회사는 자사의 프리미엄급 승용차를 프라다와 전략적으로 재디자인하여 퍼플-블루 계열의 스페셜 에디션을 선보였다. 프라다라는 네임 밸류와 고급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조합으로 해당 모델의 이미지를 끌어올렸고, 판매수익금은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이미지 메이킹용으로 단 3대만 제작했지만, 폭발적인 반응으로 현재 양산도 검토 중이란다. 그야말로 디자인과 감성, 마케팅까지 살린 일거양득의 효과이다.

컬러를 포함한 CMF의 관점에서 보자면 LG전자의 제품들이 트렌드를 발빠르게 적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상림, 함연주, 김지아나 등 예술작가와의 공동작업, 이탈리아의 수퍼 디자이너인 알렉산드로 멘디니, 패션디자이너 이상봉과의 작업, 프라다, 로베르트 카발리 등과 함께한 명품 컨버전스, 폴크스바겐 MP3, 리바이스 노트북 등의 스페셜 에디션 운영, 스와로브스키와의 라인업 전반에 걸친 표면처리 디자인, 엑스캔버스와 태양의 서커스 공동 프로모션 등등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이렇듯 세계화되고 급변하는 현대인들에게 컬러란, 단지 퍼플, 레드, 블랙 등의 색상이 아닌, 디자인적 표현기법(CMF를 최종엔 하나의 컬러로 인식), 문화적 가치의 스토리텔링 등이 녹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디오스'알렉산드로 멘디니', 트롬 '트리샤 길드' 사진

로베르토 카발리 폰, 엑스캔버스 '퀴담' 사진
(왼쪽 위 시계방향) 디오스 ‘알레산드로 멘디니’, 트롬 ‘트리샤 길드’, 로베르토 카발리 폰, 엑스캔버스 ‘퀴담’

CMF! 그 중에서도 특히 컬러에 대한 개개인의 호불호는 너무나도 다르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한 팀의 리더가 된다면 다양한 멤버로 팀을 꾸려 보고 싶다. 중후한 신뢰남, 댄디(Dandy) 가이, 엘레강뜨(Elegante) 걸, 트렌디(Trendy) 걸, 얼리어댑터(Early-adopter) 등등. 뚜렷하고 다양한 개성들이 뭉친 오색오감의 팀 말이다. 아마도 나는 내일 또 다시 질문을 받을 것이다.

“남 주임~ 요즘 가장 뜨는 핫 컬러가 뭐야?”

남기완 주임 사진Writer(guest)

남기완 주임
은 디자인경영센터 HAC디자인연구소에서 CMF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다. 순수예술을 전공하고 사회에선 디자인을 하는 이색적인 이력을 지닌 그는 예술성과 센스가 철철 넘치는 디자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