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들이 흔히 말하는 ‘내 새끼’라는 단어가 있다. 주로 자신이 디자인 해 제품화된 것을 이르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작이라 칭할 수 있는 것에만 이 호칭을 붙인다. 나 역시 ‘내 새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아쉬움이 남는 것이 있는데, 내 새끼 중에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첫’ 새끼에 대한 이야기다.

디자이너로 입사해 첫해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2003년 드디어 나만의 첫 프로젝트를 받게 되었다. 당시 디스플레이 제품의 핫 이슈는 ‘네트워크’였는데 그 중에서도  ‘Smart Display’가 유난히 주목을 받았다. 한마디로 TV도 되면서 PC 안에 있는 데이터를 무선(Wireless)으로 불러 감상도 할 수 있는 최고의 High-tech 제품이었다. 실로 2년 차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신선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셨는지, 그 일이 공식적으로 나의 첫 프로젝트가 되었다. 물론 뛸 듯이 기뻤다. 딱 1주일 동안만.

1주일 후부터 완전 죽을 맛이었다. 신개념을 디자인에 적용하기도 어려웠다. 입사 2년째, 본격적으로 스트레스’라는 것이 밀려들어 왔다. 내가 생각해온 디자이너의 이상, 또 생산을 해야 하는 현실과의 괴리감, 여기에 관계 부서 사람들과의 투쟁을 방불케 하는 논의. 바쁜 일정 탓으로 육체적인 피로감도 만만치 않았다. 잦은 밤샘과 야근으로 지인과의 연락은 이미 끊긴 지 오래. (부디 이 글을 그 당시 연락 안 한다고 욕하던 내 친구들이 봐주길 바란다.)

무선(Wireless) 디스플레이 15LW10
나의 첫 작품인 무선(Wireless) 디스플레이 15LW10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디자인이 확정되고, 드디어 제품 출시! 제품의 이름은 15LW10!
지금 보면 ‘에이 저게 뭐야…’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감히 무선 네트워크 디스플레이 제품으로 기능, 성능이 안정화된 굉장히 ‘멋진’ 디자인의 제품이었다고 자부한다.

사실 그때부터 몰래 각종 얼리어답터 사이트, 평가 사이트들을 다니며 조용히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래, 솔직히 내가 별 다섯 개 주면서 돌아다녔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창피한 일이지만, 싸이월드의 미니홈피 댓글에 일희일비하듯 각종 평가에 일희일비했다.

한 달 후, 판매 결과가 나오고 소리 소문 없이 대리점에서 조용히 제품이 사라졌다. 판매 결과가 두 자리 수… 그것도 회사 내부 거래까지 포함한 수치다. 15인치임에도 150만 원이라는 무시무시한 가격과 무선에 대한 불신 속에 내 첫 새끼는 그렇게 조용히 사라져갔다.

미드로 되살아난 나의 첫 작품
Commander in Chief그 후로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잊고 지냈다가, 2007년 미드에 빠진 그 시점에서 그때의 기억이 홀연히 떠오른 사건이 생겼다. 모두의 연인 호필과 바우어, 그리고 기디언과 하치너에 열광하며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미드들이 시즌 오프를 맞이했다. 그래서 찾은 숨은 보석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2005년 ABC에서 런칭한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커맨더 인 치프(Commander In Chief – 미 대통령을 말하는 애칭)’라는 드라마였다

미친 듯이 몇 편을 보는데, 갑자기 한 장면이 나를 꽉 붙들었다. 같은 장면을 계속 돌려 보면서 말없이 속으로 연방 ‘부라보~’를 외쳤다. 그 장면은 정계에서 여성이라고 무시를 당하던 대통령(지나 데이비스 역)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연설하고 있고, 그 연설을 흑인 보좌관(인지 비서인지)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보는 장면이다.

아~ 생각만 해도 떨린다. 바로 그 문제의 장면에 나오는 책상 위에 무선으로 작동되는 TV가 “바로바로바로바로 내 새끼”인 것이다! 나중에 보니 그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백악관 책상 위엔 요놈의 녀석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론 그 얘기를 듣고 주위에서 “드라마 안에 나오는 제품이 얼마인데~”, 또는 “확실히 그거 맞아?”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낳은 새끼 못 알아보는 어미가 있는가. 판매가 부진하다고 구박받은 인고의 세월, 몰래몰래 별 다섯 개를 주고 다니던 어둠의 기억, 이런 것들이 그 미드의 한 장면과 함께 내 뇌리에서 사라지며 안녕을 고했다. 이미 내 머릿속에선 이 드라마가 몇 년이나 철 지난 미드라는 사실은 잊은 채, 나 자신에게 칭찬을,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만큼 해 주었다.

지금에 와서 뒤늦게 내가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 간단하다. 세상에 못난 디자인은 없다. 다만, 때와 시기가 맞지 않았을 뿐이다. 구박받는 세상의 모든 디자이너여, 자신있게 지르자!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다. Be Happy Now!!

Writer

차현병 선임(수작걸지마)
은 디자인경영센터에서 LCD TV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으며, <Be Happy Now>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 단순히 예쁘고 편한 디자인을 넘어 모든 이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제품을 디자인하고 싶어한다. 요즘 재미를 붙인 취미는 낚시이며 한 때 국내 출시되는 모든 밀리터리소설을 다 사 모을 정도로 푹 빠져 있기도 했었다. 닉네임은 ‘수작걸지마’이며 모든 게임, 인터넷 활동을 같은 닉으로 사용하니 아는 척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