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아보라면,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결혼후에 4년만에 어렵게 얻은 첫 아이가 탄생하는 순간일 겁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어쩌면 더 저를 울렸던 순간이 있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희 친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 혼자 저와 저희형을 키우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지요.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셔서 반찬가게를 하시고, 좀 더 큰 가게로 옮기시고…

그러면서 법적문제도 겪고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분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어머니는 재혼을 하셨고,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해에 저에게는 새아버지가 생겼습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반항심리가 있는데,

특히 저는 어머니께서 재혼을 하시면서 새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컸습니다.

같이 밥도 잘 먹지 않고, 평일에야 아침 일찍 나가서 자율학습으로 밤에 돌아왔으니 상관없었지만,

주말에도 공부한다는 핑계로 아침부터 독서실에 가거나 도서관으로 가면서 새아버지를 피했지요.

 

대학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왔던 탓에 서울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방학이 되어도 집에 내려가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서울에서 지냈습니다.

집에는 손을 벌리기 싫어서 혼자서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해가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었지요.

집에 손을 벌리면 새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같았거든요…

 

밥도 잘 챙겨먹지 못하고 가스비 아끼느라 자취방 난방도 안해서 폐렴이 걸렸던 적이 있습니다.

혼자서 끙끙앓고 있다가 상태가 심각해지자 옆방 선배가 집에 알렸던 모양이었습니다.

저를 등에 업고 병원에 데려가서 밤새 간호해준 분은 새아버지였습니다.

밤새 앓다가 새벽녘에야 정신이 들어서 눈을 떴는데 제손을 꼭잡은 채로 새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때 새아버지에 대한 이유없는 미움이나 그런 것들이 사라졌지만,

어떻게 표현해야하는지 몰라서 그 뒤로도 여전히 새아버지와는 서먹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첫 아기가 없어서 저희 부부는 무척 걱정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4년만에 임신이 되어서 기쁜 마음에 부모님께 알려드리러 주말에 내려갔었는데,

부모님이 집에 안계셨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부모님께서는 매일매일 저희 부부를 위해서 100일 기도를 드리고 계셨던 거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새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드리지 못하고 그냥 새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참 불효자이지요…

 

드디어 출산일이 다가오고, 아내는 예쁜 공주님을 낳았습니다.

건강하게 자란 공주님의 100일이 되어서 가족들과 함께 조촐하게 식사하면서 100일을 기념했어요.

그때 부모님도 서울로 올라와서 저희 집에 머무셨지요.

육아와 100일 손님 치르느라 피곤했던 저와 저희 아내는 아이가 우는 것도 모르고 그냥 자고 있었나봅니다.

잠결에 목이 말라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보니,

새아버지께서 손녀를 안고 계셨습니다. 조용히 다독이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만 눈물이 나왔지요.

저도 모르게 손녀를 안고계신 아버지를 꼭 껴안으면서 ‘아버지’라고 처음으로 불러드렸습니다.

새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으시고는 아버지가 어둠속에서 지으시던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정말 행복한 표정이었고, 그 표정을 보면서 저는 그동안의 불효에 대해서 너무도 죄송했지요.

 

부모님께서는 농사일과 목장일이 있으셔서 다시 시골로 내려가셨고,

며칠 뒤 새벽에 아버지께 문자가 하나왔습니다.

새벽에 새로 송아지를 낳았는데, 그 송아지는 저희 딸 몫이라면서 직접 사진을 찍으시고

소의 출산을 도우러 왔던 수의사에게 부탁해서 사진을 MMS로 전송시켜달라고 하셨던 겁니다.

새벽에 그 사진을 보면서… 저는 진정으로 아버지께 다시 한 번 죄송했고,

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첫 아이가 태어난 것 만큼이나 행복했던 순간,

그리고 저에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송아지 사진입니다.

지금은 스마트폰을 쓰지만, 예전에 쓰던 전화기속의 사진을 하드에 항상 저장해두고,

스마트폰에도 옮겨두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