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 아기의 사진

유난히도 선명하였던 붉은 두 줄의 선을 보고 저는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 임신.

저는 울 수도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었습니다.

서른둘에 이르지 못한 결혼을 하였기에 더욱 더 아이만을 기다려온 우리 부부였습니다. 노산이라는 주변의 이야기에 걱정스럽기도 하였지만 결혼하고 바로 임신을 했기에 모든 근심이 사라진 것만 같았습니다. 너무도 작고 귀여운 아이를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사진으로 처음 만나게 되던 날 ‘콩이’라는 태명을 지어 주며 무럭무럭 자라길 두 손 모아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채 3개월이 되지 못하여 유산을 하였고 저는 큰 실의에 빠졌습니다.

유산의 충격으로 직장까지 관두게 되었고 다시 아이를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쓰디쓴 보약과 여기저기서 들은 민간요법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곧 아이가 생겼고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바깥출입은 물론 집에서도 꼼작 하지 않으며 극진한 남편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임신 11주째 또 유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두 번의 유산으로 저 또한 야위어 갔지만 제 몸보다 그 작고 조그마한 생명들이 나의 탓으로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것 같아서 죄스럽고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이유도 알 수 없다는 계류성 유산.

이대로라면 습관성 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울고 또 울었습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두 번씩이나 보내야 했던 것이 부족한 엄마의 잘못인 것만 같아 우울증까지 생겼습니다. 고통과 한숨으로 보내야만 했던 1년여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 봐도 길고 또 길기만 하였습니다.

“딱 한번만 더 우리 노력해보자. 이번엔 괜찮을 거야“

남편은 저에게 용기를 주었지만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연이어 찾아 온 두 번의 유산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저였고, 무엇보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불임부부보다는 낫지 않냐 는 말로 누군가는 저를 위로도 하였었지만 제 안에서 자라나던 생명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아픔은 아마 누구도 겪어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힘겨운 일이였기에 말입니다.

그렇기에 세 번째 임신 사실을 알고도 전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과 친정엄마 그리고 시어머님께, 그리고 무엇보다 말기 암으로 병상에 누워 계신 시아버님께 쓰디 쓴 고통을 나눠드리게 될까봐 저는 그토록 기다리셨던 임신을 했다는 사실도 말씀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곧 알아 채 버렸고, 이번엔 아무 일 없을 거라 저를 다독여 주었습니다.

두 번씩이나 유산의 쓰라림을 겪었던 우리 부부였기에 아이에게 붙여 주어야 할 태명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것도 어쩜 당연한 일이였습니다.

항상 고비였던 임신 4개월을 겨우 넘기고 오랜만에 시아버님이 계신 병원으로 남편을 쫓아 나섰습니다. 남편만 알고 있던 친정엄마께도 시어머님께도 말씀 드리지 않았던 임신이었는데 시아버님은 어떻게 아셨을까요?

약간 몸집이 불어난 저를 보시곤

“아가! 몸도 무거운데 앞으론 함부로 오지 말거라!”

하시며 아버님은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으셨습니다.

제가 두 번째 유산을 하고 난 뒤 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던 아버님이셨습니다. 이미 뼈와 장기에 번져서 수술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기에 가족 모두가 어쩜 아이를 더 바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님께 다녀왔던 다음 날 저녁.

말씀도 드리지 않은 임신 사실을 시아버님이 아신 것에 너무도 놀라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장문의 문자 한통이 제 핸드폰으로 들어 왔습니다.

‘아가! 아버지가 고심 끝에 말하는 게야. 태명은 난이로 지었으면 좋겠구나. 늙은이가 믿는 미신인지도 모르겠다만 옛 어르신들 말씀이 궂은 이름일수록 건강하게 큰다고 하더구나. 못난이로 하면 좋을 것 같구나. 못난이니까 더 건강하게 자랄 것이야. 그리고 행여 다른 이름으로 짓더라도 아버지는 괜찮으니 대신 매일 매일 잊지 말고 불러 주면 좋겠구나. 태명을 자주 불러 주면 복중의 아이도 아마 엄마 아빠의 음성을 듣고 무럭무럭 잘 자랄께야. 이제 병원에는 절대 오지 말고 오로지 몸조리에만 집중 하거라.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도 고맙구나. 우리 아가!’

못난이라는 못난 이름에 알 수 없는 눈물이 봇물이 되어 터져 버렸습니다. 미신이라도 좋았습니다. 예쁘지 않은 이름이라도 좋았습니다.

힘겹게 병마와 사투하고 계신 아버님이 며느리를 위해 또 손주를 위해 편찮으신 몸으로도 오래오래 생각해서 지어주신 태명이었으니까요.

약속이나 한 듯 우리 아이의 태명은 ‘못난이’ 가 되었고 우리는 시아버님의 말씀처럼 태명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러 주었습니다.

‘난아’ ‘못난아’라 부르는 것이 우리부부에겐 일상이 되었고 모든 지인의 이름도 그 태명으로 대신 되었습니다.

난이 아빠. 난이 엄마. 못난이 할머니…….

제 동생들의 이름도 각각 못난이 이모 못난이 삼촌이 되었습니다.

병원에 들를 때마다 의사선생님은 언제나 위험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서른 넷, 늦은 임신에 엄마도 건강하지 못하고 또 유산의 경험도 두차례나 있고 또 무엇보다 뱃속의 아이가 너무 작다 하셨습니다.

다른 산모보다 세 네 배는 많이 병원에 다녀야만 했습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수십 가지의 검사를 받고도 안심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른 아침 남편이 출근하는 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언제나 ‘난이야’ 하면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잊지 않았습니다. 믿음직한 남편도 언제나 저를 더 위해 주시는 모든 가족들과 친지들도 마찬가지로 항상 아이의 태명을 불러 주셨습니다.

“난이야! 건강해야 해.”

“못난아! 우리 빨리 만나자.”

수천 번, 그렇게 수만 번 못난이를 부르고 나서야 올해 8월 난이는 세상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정일보다 보름이나 늦게 수술을 해 아이를 낳아야 했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난이는 건강했습니다.

그렇게 난이는 우리 부부에게 기적이 되었습니다.

못난이는 시아버님의 바람처럼 그리고 또 우리의 소망처럼 건강하게 태어나 주었고, 60일이 되어가는 지금은 어느 아이들보다 더 건강하고 튼튼해 매일이 행복하기만 합니다.

“못난아!”

하고 부르면 뱃속에서 강하게 발길질을 하고 움직이던 우리 주원이.

못난이란 태명은 우리 주원이에겐 세상과의 첫 소통이었고, 그 태명이 가진 의미를 알고 무럭무럭 자라주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못난이 할아버지가 되신 시아버님은 힘겨운 병상 생활을 잘 견디고 계십니다.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셨던 첫 손자 때문에 이제 살아 갈 힘이 생겼다고 하십니다.

‘못난이’란 태명은 아버님의 마음이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힘겨운 병마와 싸우고 계시면서도 아들내외에게 찾아 온 아이가 건강하기만을 더 바라시고 소망하셨던 아버님의 애 끓는 사랑이 우리 주원이에게도 전해진 것이겠지요.

난이 할아버지 하며 주원이가 할아버지를 불러 드릴 수 있는 그날까지도 아버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길 기도해 봅니다.

내 인생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바로 사랑하는 우리 원이를 만났던 그 날입니다.

우리가족 모두에게 원이를 만난 그 날은 아마도 영원한 행복으로 기억 될 것 입니다.